9.11 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미국이 공격당한 5년전 9.11을 떠올리고, 33년전 칠레의 민주좌파정권이 공격당한 9.11은 잊혀졌거나 아예 인지의 필터링 과정에 들어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아옌데, 가수 빅토르 하라 등은 1973년 9월 11일 쿠데타로 세상을 떴고, 원래 대통령 후보였으나 아옌데와 후보연합을 하고 물러나 아옌데의 당선을 도왔던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지병이 악화되어 몇주후에 숨을 거둔다. 이들은 훗날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 "영혼의 집", "일 포스티노"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몇해전 쿠데타 세력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어느정도 민주화가 진행되었지만, 쿠데타와  군사정권 하에서의 고문,학살의 주모자들은 권좌에서 물러날때 안전을 보장하는 법조항을 만들고 물러나서 아직도 제대로 진상규명과 처벌이 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5,6공세력들과 매우 비슷하다.) 칠레법으로 처벌은 불가능했지만, 쿠데타의 주모자 피노체트가 스페인판사의 영장에 의해 인도주의적범죄 혐의로 국외에서 체포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결국 다시 칠레로 되돌려졌지만...

여기에 10여년 전 가슴을 울리던 고 정운영 선생의 한겨레신문 컬럼을 옮긴다. [각주:1]


산티아고, 1973년 겨울  

정운영, 한겨레신문 1993년 9월 21일자


지난 11일 오후 나는 연세대에서 개최된 ‘이론 포럼’의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도 계급모순이비계급모순에 우선하는지를 캐묻고,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병행한 일본의 총평이 과연 ‘전술적’ 오류를 범했는지를 따지는 열띤논의들이 연사와 청중간에 교환되었다. 나의 귀와 눈은 분명히 그쪽으로 열어놓았는데도, 머리와 가슴은 전혀 엉뚱한 연상을 쫓고있었다. 20년전의 오늘, 즉 1973년 9월11일 칠레의 대통령 관저 모네다궁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살바도르 아옌데의 최후에 대한 상념이 그것이었다.

이날 새벽 쿠데타 보고에 접한 아옌데 대통령은 34년 동안 고락을 같이한 부인 오르텐시아 여사와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는작별인사를 전화로 나누고, 군인의 명예를 버린 자들에게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방송으로 국민에게 고별인사를 보냈다. 관저를포위한 반란군은 항복과 해외탈출을 종용했지만 아옌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다만 그의 경호원들에게 피신을 권하면서, “무기는두고가라구, 저들과 싸우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말이야”라고 외칠 뿐이었다. 정오를 기해 공군 제트기가 로킷 폭격으로 모네다궁을박살내고 탱크를 앞세운 육군 기갑부대가 대통령 집무실로 육박하는 가운데, 자동소총을 거머쥔 65살의 대통령과 차마 그의 곁을떠나지 못한 42명의 경호대는 실로 역사만이 그 승패를 판정할 최후의 일전을 벌였다. 오후 2시 반군 선발대의 한 대위가 쏜6발의 총탄이 아옌데의 복부를 관통함으로써 저항은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

○역사만이 판정할 최후 일전

아옌데는 의학을 공부하다가 사람의 질병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보았고, 그 대안 탐색에 몰두하다가 접한 급진적 독서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다고 레지 드브레가 엮은 〈아옌데와의 대화〉에서 고백했다. 그는 칠레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도 노선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다는 이유로 1933년 사회당 창설을 주도했다. 1952년 첫 출마 이래 네번째 도전이 되는 1970년 9월의 대통령선거에서 마침내 그의 야망을 실현하게 된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인민의 가혹한 착취로 짜내는 구리가 묻힌 저 저주스런 언덕에서도 자유의 힘찬 물결이 솟아올랐다”고 이날의 감격을 묘사했다.게바라는 “다른 방법으로 같은 결과를 얻으려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헌사가 담긴 자신의 저서 〈게릴라 전쟁〉을 선사했는데,그 ‘다른 방법’이 막 실현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과반수 득표에 미달했으므로 의회의 지명투표를 거쳐야 했다.

선거를 통한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그것도 라틴아메리카에서 탄생하려고 하자 미국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30대 다국적회사 가운데 24개가 칠레에 진출했고, 은행을 제외한 칠레의18대 기업이 모두 이들의 자회사라는 사정이 미국의 불안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 “한 나라가 무책임한 국민에 의해 공산화되는것을 우리가 왜 방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키신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즉시 ‘거사’ 준비에 나섰다. 우선 의회의지명투표에서 반란을 유도하기 위해 칠레야당에 접근했으나, 그들은 이런 대답으로 유혹을 거절했다. “그러면 아옌데 지지자들은 투표할 권리만 있지 승리할 권리는 없는셈이군요.” 다음 수순은 당연히 힘에 의한 전복이었다. 그러나 육군참모총장이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하고 헌정수호를 다짐하자,미국의 기도는 다시 좌절되었다. 참다운 ‘군인’ 레네 슈나이더 참모총장은 그해 10월 암살당한다.

○길어서 불편한 칠레의 지형

한달 뒤 의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지명된 아옌데 대통령과 그의 인민연합 정부는 개혁 공약을 착실히 이행했다.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고, 칠레 인민의 젖줄이라는 구리광산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무엇보다도 이 국유화가 미국을 격분시켰다. 한 예로 미국의 아나콘다 구리회사는 1971년 전체 투자의 16.6%를 칠레에 배정했으나 전체 이윤의 79.2%를 이곳에서 회수하는 형편이었다. 칠레에서의 이윤율이 세계 평균의 5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국유화에 맞서 미국은 자신이 비축한 구리를 일시에 방출하여 국제가격을 15.7%나 떨어뜨렸는데, 이로써 칠레의 구리 수출은 22.2%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미국은 모든 영향력을 동원하여 외화수입 통로를 차단하고 외채상환을 독촉함으로써 칠레의 경제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긴 것이 이따금 불편할 때가 있는데, 칠레의경우가 그러하다. 남북으로 4천3백킬로미터나 뻗었으나 철도 부설이 부진한 이 나라에서 트럭운송은 국민경제의 사활을 좌우한다. 이점에 착안한 미국 기업들이 타이어를 비롯한 부품 공급을 일절 중단하는 바람에 트럭과 버스의 3분의1이 고철로 변했으며,1972년 10월에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트럭운수업자를 매수하여 이른바 ‘자본가 스트라이크’를 유도했다. 아옌데 정부는운송요금을 한목에 120%나 올려주면서 그들을 달랬으나, 이 반역자들은 끝내 외세의 장단에 놀아났다. 물자수송이 중지되자 상점이문을 닫고, 공장의 기계가 섰다. 1973년 4월 반대파의 회유에 넘어간 ­누가 무어래도 그들만은 그래서는 안되는­구리광산노동자마저 파업에 나서 칠레의 경제는 온통 마비되고 말았다. 그들의 파업은 진정 브루투스의 비수였다.

○죽음조차 절망만은 아닌

정치판도 엉망이었다. 인민연합내의 사회당은 국유화의 확대로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의 동시 추진을 주장했고,공산당은 전통적인 단계혁명론을 내세우며 사회주의적 과제의 유보를 요구했다. 이 와중에서 아옌데는 미래의 전진을 위해 현재의개혁을 ‘고정하는’ 칠레판신경제정책(NEP)으로 선회했다. 기껏 공업생산의 22% 정도를 국유화한 물적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적 과업을 이행하려는‘욕심’이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1973년 9월7일 아옌데 대통령은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을 위시한 몇몇 장군들에게 나흘 뒤자신의 신임을 묻기 위한 국민투표 실시를 공포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바로 나흘 뒤 피노체트의쿠데타가 그 기회를 압살했기 때문이다. 드브레의 소설 〈불타는 설원〉에서 아옌데는 “절망적인 상황이란 없네. 다만 절망에이르도록 방치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라고 토로한다. 정녕 그렇다면, 그의 죽음조차 절망은 아닐는지 모른다.
  1. 정운영 선생의 컬럼은 인터넷한겨레에 올라와 있지 않으며, 라틴아메리카문학21 덕에 타이핑의 수고를 덜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Rainyv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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