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포스텍 수석 졸업생이 의대 가는 현실 을 보고

잘된 일이다. 지금까지 뛰어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이공계를 택해 왔던 것이 오히려 지금사태의 원인 중 하나다. 세상의 대부분은 한쪽으로 치우쳤던 것이 바로 가운데로 수정되기보다는 반대편으로 갔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갔다가 하면서 진폭이 줄어들면서 가운데로 수정되는 경우가 많다. (공학에서 말하는 overshooting... ^^) 이공계에 너무 많은 우수한 사람들이 몰렸으니 이젠 그 반대현상으로 치우칠 때가 되었다.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했던 소위 인재들이 이공계를 택한 후에 처한 현실과 의대나 고시 쪽으로 줄 잘 섰던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분명하게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이공계탈출과 의대신드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비합리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런 날이 올지 안 올지, 만일 온다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지금 의대로 몰린 인재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잘먹고 잘살기 힘들어진다면 그 때 가서는 학생들은 다시 이공계나 다른 쪽을 선택하겠지. 주식이건 예금이건 부동산이건 수익을 낼 수 있는 쪽으로 돈이 쏠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이공계이건 의대이건 고시이건 심지어 인문학이건 안정되고 고수익이 보장되는 쪽으로 사람들이 쏠리는 것도 당연하다. 포항공대를 수석졸업했다 해도 이공계에서 자신이 얻을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면 의대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멀리 가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참 대단한 인물들이 많았었다. 전국 수학올림피아드에서 1등,3등을 차지한 두 친구, 교육부 주관 전국 수학경시대회에서 2등을 차지한 친구가 다 동기들이다. 한마디로 세 명 모두 대한민국의 같은 또래 중 가장 수학 잘했던 애들 10명, 아니 5명을 뽑으면 거뜬히 들어갈 친구들이었던 셈이다. 인생은 관뚜껑 닫는 날이 되어 봐야 알겠지만, 그리고 인생의 행복이란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만족도가 더 큰 것이겠지만, 그 세명의 인생을 보면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냥 그저그렇다. 두 사람은 박사까지 마쳤으나 아직도 자신들의 능력을 펼만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샐러리맨이 된 후 별로 만족하지 못하면서 지내고 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다행히도(!) (소문에 의하면, 교수들 눈밖에 나서) 대학원 진학을 하지 않고 병역특례회사를 전전하다 지금은 미국에서 회사다니며 잘먹고 잘살고 있어서, 역시 공부와 행복은 반비례의 관계에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 그 친구의 행복에 함께 기뻐하면서도 그 친구의 능력과 집념을 아는 나로서는 가끔은 그 친구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곤 하는데, 이게 내가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공헌'과 '보람'과 '명예' 따위의 가치에 아직도 물들어 있기 때문일 터이다. 반면에 늦게서라도 이공계를 때려치우고 의대로 치대로 발길을 돌렸던 친구들은 다들 무난한 삶을 살고들 있다.

인력시장도 하나의 시장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편의상 일단 모든 직업선택자들이 같은 보수 척도(재화시장에서의 돈과 같은 존재)로 직업을 선택하고 (주: 이것은 개인들을 보면 비현실적인 가정이지만 개개인의 선호도가 서로 상쇄되어 집합적으로 고려된다면 그리 비현실적인 가정은 아니다), 정보가 모든 직업선택자들에게 완벽하게 공개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정보공개 가정에 대해서는 다음문단에 다시 들여다 보자.) 그렇다면, 이공계와 의치약계열로 나뉘는 직업선택자들의 능력의 통계적 분포가 두 계열의 보수의 통계적 분포와 거의 일치할 것이다. 요즘 "이공계 기피현상"이라 일컬어지는 현상은 두 그룹이 능력의 분포와 보수의 분포가 과거에는 심하게 불일치하다가 최근에는 일치되어 가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상위 *%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에 한참 못미치는 분야를 많이 택했었는데, 이제는 상위 *%의 소득을 가질 수 있는 직종을 대부분 선택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극히 자연스러운 시장의 자기조정과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예전에는 인력배분이 소득분포와 다르게 진행되었다가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인력시장의 자기조정과정이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예전에 인력시장에 있었던 정보의 왜곡과 부족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제 더이상 옛날 1980~90년대처럼 전국민을 대상으로 계몽적 사기극을 동원해서 이공계로 인재 몰아넣기를 하는것은 불가능해졌다. 첫째 이유는 IMF이다. IMF는 두가지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전국민이 이공계를 위시한 샐러리맨들의 불안한 현실을 체험/목격했고, IMF 이후로 급속히 금전만능주의적인 가치관이 더욱 확산됨으로써 이공계 연구인력들 나름의 자부심과 존재감의 근거가 희미해지고 있다. (비슷하게 의대 내부에서도 소위 옛날의 메이져 과들 보다는 돈 잘버는 과로 성적우수자들이 몰린다고 한다.) 둘째 이유는 인터넷의 확산으로 인한 정보의 빠른 공유이다. 예전에도 평균적으로 의사들이 연구원들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은 거의 마찬가지였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그때는 국가에서 '이공계가 중요하고 유망해'라고 선전하면 그에 반대되는 정보가 흘러다니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그런 선전들은 어디까지나 총자본의 이해에 부합하려는 국가의 인력공급정책 때문일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집합적으로 취합 공유되는 정보들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안다.

고급 이공계 인력의 의사 집중 현상이 바람직한지 어떤지는 난 관심도 없고 잘 모르겠으나, 이러한 현상들이 지속될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 보았다. 내 결론은 계속 한참동안 지속된다이다.

나의 기본입장은 어떤 직종이 특정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가는 그 직종의 '고유한' 무엇인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된 사회적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석유는 예나 지금이나 땅속에 묻혀 있었는데, 석유 자체가 원래 유용한 고유한 특성이 있어서 석유가 중요한 자원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방향으로 이 현대사회가 석유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수송수단,수요 등을 갖추고 있어서 석유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이 된 것 뿐이다. 그래서 매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의사가 사람을 치료하는 고귀한 직업이어서 또는 공부를 오랫동안 많이 해야 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인력의 제한된 공급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때문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구조를 계속 재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다. 의사가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으나 어떤 나라에서는 보통 노동자와 비슷한 수준의 소득만을 얻고 어떤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겨우 중인 정도의 취급을 받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직업 자체의 신비한 그 무엇이 있다는 착각을 버리고 사회적 제관계 속에서 그 직업의 위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의사인력 수급이 적절하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고 나는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만한 식견이 없으나, 의사집단의 균일성, 경제력과 기득권층과의 인적네트워크, 일사분란한 명령체계와 검증된(!) 집단적 실력행사 능력, 그리고 그에 따라 인력수급이 기성집단에 의해 콘트롤되는 정도는 비교할만한 타직종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으며 (아마 군인 정도가 예외 아닐지... ^^), 이것이 그들에게 어느 수준 이상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추측에도 어느정도 일리는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다시 이공계로 돌아와서... 마치 없었던 일이 새로 생긴것처럼 갑자기 여러 신문 사설들이 '이공계 기피 이대로 좋은가'  식의 사설을 쓰고 있다. 그들이 이제 와서 이공계로의 유인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대우를 잘 해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공계 졸업생이 전체 대학 졸업생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마당에 정부가 나서서 그들에게 보조금을 주는 식으로 대우를 높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은 대부분의 이공계생들을 고용하고 있는 민간부문(쉽게 말해 기업들)에서 해결을 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불행히도 문제의 핵심은 80년대 후반에 카이스트, 포항공대의 설립과 90년대 서울대 등의 공대 대폭 증원으로 인해 이공계 인력이 넘쳐난다는 데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영국과 독일의 공대 졸업생을 다 합친 것보다도 공대생들이 더 많이 배출되는 실정이고, 소위 명문급에 해당되는 인력도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상 필요한 인력보다 훨씬 더 많으니, 개별기업의 입장에서는 처우를 그리 잘 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필요 이상으로 비용을 지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장기적인 안목에서 이공계 인력의 전반적 수준을 제고하는 것은 당장 개별 기업의 입장에서는 별로 큰 고려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인력이 계속 과잉공급되어 적은 비용으로 고급인력을 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엔지니어들은 의사들처럼 엄격한 자격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고급인력과 보통인력 사이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설사 이공계의 전반적 수준은 떨어지더라도 잉여의 보통인력들의 존재는 고급인력을 고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기업들 입장에서는 그리 많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이처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이 문제 해결에 나설만한 동기 부여가 어렵다면 다른 대안은 이공계 자체적으로 이같은 인력공급과잉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또한 간단치 않다. 이공계 기피를 의사들처럼 엔지니어들이 균일한 집단도 아니고 그들의 엇갈리는 이해관계 때문에 한 번 과도하게 늘어났던 공대 정원을 이제 와서 줄인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 공대 증원을 추진하던 기업의 고위급 엔지니어들과 대학교수들의 이해관계는 대부분의 다른 엔지니어들과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의대교수들이 의대생들의 의대정원증원에 항의하는 수업거부를 용인 내지는 격려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현상이다. 의대교수들의 정체성은 의사가 우선이고, 공대교수들의 정체성은 교수가 우선이다.)

그래서 앞서 말한대로 나의 결론은 무척 냉소적이다. 하여간 인력시장(?)에서의 수요공급 조절을 통한 시장원리(?)에 의한 해결은 난망해 보이고, 이 시장의 실패를 조정할 '총자본'으로서의 국가의 개입 역시 어려워 보이고, 당사자들의 봉기(?)/노력에 의한 해결도 어려워보인다. 그래서 해결방법이 안 보인다. 그래서? 갈때까지 가 보는 수밖에... 바닥을 칠 때까지 가다 보면 올라갈 날이 있겠지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계 이상이 되면 우리나라가 기술경쟁력을 잃어서 산업이 몰락하고 엔지니어들이 지금보다 더 필요없는 날이 와서 바닥을 영원히 못 칠 수도 있을 것이고, 다행히 이공계 수준이 연착륙에 성공하고 자영업자와 고소득자에 대한 투명하고 누진적인 과세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다른 분야에도 공급과잉이 벌어진다면 다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황이 좀 암울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상황이 솔직히 별로 나쁜 건 아니다. 좀 더 냉소적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밑에서 치고 올라올 무서운 후배들이 없을수록 나의 상대적 경쟁력은 오히려 올라가기 때문에 지금의 이공계 기피가 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요새 같은 세계화 시대에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국가간 이동이 가장 쉬운 직업군 중 하나이니 이것만큼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혹시나 해서 사족을 좀 달면...

  1. 행복 또는 경제적 여유가 꼭 성적/학벌순이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답은 아니오이다. (우리남매들을 보니 경제력은 반비례 관계에 있는듯 하고 난 전혀 불만이 없다.^^) 단지, 현실적으로 우리의 물질적 삶은 국가경제력에 의해 많이 좌우되고, 기술경쟁력은 경제력의 아주 중요한 일부이고, 이공계인력수준과 기술경쟁력 유지 사이에는 어느정도의 관계가 있다는 가정 아래에서 이 글을 썼을 뿐이다.
  2. 왜 의사만 가지고 그러느냐 묻는다면 현 세태에서 이공계 기피는 거의 의대선호와 동일어이기 때문이라 답하고 싶다. 솔직히 이공계 일부 분야에서의 경제적 대우는 그리 나쁘지 않으나, 단지 이공계의 최상위 1%인력에 대한 처우가 의사 최하위 10%인력에 대한 처우와 비슷한 정도라면 상대적 박탈감이 있을 것이고, 예전의 소위 명문대 공대나 자연대를 다녔던 사람들은 최상위 1%는 껌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자신들과 주위사람들이 그사람들의 사회진출 이후의 현실을 너무 잘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작금의 이공계 기피현상이다. 이 답변이 그래도 정 맘에 안든다면, 의사 대신엔 맘에 드는 어떤것이라도 (예를 들면, 고시, 기자, 교사 등) 저기에 대입해서 읽으면 된다.
  3. 가끔가다 네가 의대 안 가서 저런 얘기 하는것 아니냐는 식의 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한마디로 '즐~'이라 답해주고 싶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비평, 비판을 그런식으로 얘기할 사람이다. 서울대 비판하면 '네가 서울대 못가서', 권력층 비판하면 '네가 권력없는 패배자라서'... 재밌는건 이렇게 논거 대신 상대방의 배경을 두고서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더라. "개헌? 필요하긴 한데 그거 노무현이 하자고 해서 싫어." 이런 사람들이 50%라며!
  4.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직업이라 해도, 솔직히 내게 의대공부/수련을 건너뛰고 (의학적 지식과 기술과 마인드를 순식간에 마법으로 이식해 주고) 당장 의사 하라 해도 내 대답은 '노~'이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이 절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의사는 '세균과 핏덩이가 튀는 자동차'를 고치는 수리공보다 더 불편하고 고단하고 피곤한 직업이다. (그래서 존경받아야 하는 직업이다. 다른 모든 직업처럼 말이다.) E군처럼 피 안보는 기초의학이면 모를까... 하지만 기초의학이나 이공계나 뭐 그게 그거지... ^^
  5. 그래도 인문계보다는 낫네 어쩌네 하는 문제제기는 일면 타당하지만 그런식으로 물타기 하는 것도 '즐~'이다. 글 하나는 하나의 토픽에 대해서 쓰는 것이다. 내가 글 하나에 세상의 온갖 관련 이슈를 다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6. 써 놓고 보니 괜히 내가 실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너무 냉소적으로 쓴 듯 하다. ㅋㅋ
Posted by Rainyvale
,


공직선거법 개정 촉구 상단 좌측